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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한 지역주민들의 건강을 담보하다
필리핀 지역보건인력 역량강화사업
필리핀 중심지에서 떨어진 불라칸은 도심에서 거주하다가 밀려난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민들이 갖고 있는 질환은 경제적 궁핍을 더욱 촉진시키고 보건 서비스의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해왔다. 코이카(KOICA)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함께 손잡고 지역보건인력 역량강화사업에 뛰어든 이유이다.
지속성이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이경민 교수가 가장 처음 던진 말이었다. 코이카와 함께 2016년~2018년까지 필리핀 불라칸 지역에서 ‘지역보건인력 역량강화사업’을 진행한 이경민 교수의 발음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해외 개발협력 활동이 대부분 외부 전문가들이 해당 지역을 찾아가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지속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인 바, 여기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지역 내 보건인력의 역량을 강화시키겠다는 의지가 바로 이 사업의 출발지점이었던 것이다.
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필리핀 불라칸 지역은 도심 재개발 정책으로 도심에서 밀려난 주민들의 거주지였다. 특히 강제 이주된 이주민에 대한 정부 지원 의료 서비스가 충분하지 않아 지역민들은 각종 질환에 시달림에도 적절한 정보를 얻거나 진료를 받지 못했고 이는 다양한 문제를 야기했다.
“해외 개발협력 활동에는 그 선의로 인해 일어나는 부작용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외부에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자체적인 서비스 역량을 기르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게 그 중 하나이지요. 지역 내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지역보건축제
사업 시작 전에 불라칸 지역을 수차례 방문했던 이경민 교수는 이 지역에 보건의료역량 강화산업이 필요한 이유로 세 가지 측면을 봤다.
▲첫째, 이 사업이 이 지역에 필요한 일인가. ▲둘째, 사업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가. ▲셋째, 주민들을 교육했을 때 이를 지속할 수 있는 교육 기관이 있는가, 기관에 의지가 있는가.
그리고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했던 불라칸 지역에서 2016년부터 보건의료역량 강화 산업이 시작됐다.
(왼쪽) 보건교육, (오른쪽) 주민체조
현지 주민, 교육을 통해 확 달라지다
사업의 목표는 명확했다. 우선 장기적인 목표와 3년 단기 목표를 세웠다. 장기 목표로 잡은 것은 지역사회 내 보건 문제를 확인하고 해결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키우는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위해 3년간 코이카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팀이 기획하고 진행했던 것은 교육 커리큘럼을 만들고 마스터플랜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이 숙고 끝에 만든 교육 커리큘럼에는 현지 주민이 직접 참여했다.
전체 지역주민이 10만 명, 그 중 보건의료 활동 교육이나 활동에 참여한 사람이 몇천 명, 그 중 리더가 또 수십 명이 있는데 그 수십 명을 트레이닝 시키는 교육 프로그램을 가동한 것이다. 역량강화 활동을 통해 양성된 리더들은 각자 자기 동네로 돌아가 주민들에게 보건의료 서비스를 시행했고 그 영향력은 주민 전체에게 달하는 효과를 일으켰다.
이쯤에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그렇다면 이들이 받은 교육의 수준은 어느 정도였을까?
(위) 지역보건축제, (아래) 학교보건
“진료는 정보를 주는 겁니다. 정보를 알면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진료가 80% 정도 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어요. 우리가 역량 강화를 시켰다는 것은 뇌수술 같은 전문적인 의학 기술을 가르쳤다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에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부분을 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줬다는 겁니다. 역량을 가진 지역 인재들이 보건 문제를 80% 정도 해결할 수 있는데 그동안 못했습니다. 왜냐, 할 줄 모르니까요. 아는 지식과 실행 기술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혈압 환자들을 위해 혈압을 재는 게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일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그걸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건 병원에나 가야 할 수 있는 것, 의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벽을 허무는 게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경민 교수의 이 말은 불라칸 지역의 보건의료 이슈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었다. 코이카의 이번 사업은 만성병, 즉 비전염성 질환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유는 사회에서 가장 임팩트가 큰, 경제적인 문제를 일으키거나 주민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게 바로 비전염성질환(Non-Communicable disease, NCD)이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 정도의 중소득국가에서 가장 부담이 되는 건 고혈압, 당뇨, 비만 등의 비전염성 질환이다. 이는 심장병, 뇌혈관질환, 암 등을 일으키면서 의료비용 부담을 가중시키고 이로 인한 사망률 증가로 노동력 상실이 일어나면서 사회 전체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보건의료인력 역량을 강화시키는 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BKP 주민조직
지역민들의 자존감 그리고 자신감이 불러온 것
불라칸 보건의료인력 역량 강화 사업의 효과는 놀라웠다. 불라칸주립대에서 이루어진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지역민들은 자신이 교육을 받아 트레이너가 된다는 사실을 아주 자랑스러워했고 이는 수강생의 자존감을 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더불어 지역주민의 열성을 효과적으로 고양시키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역량 강화 사업에 가장 중요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해외 개발협력 사업을 하다보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차이가 명백한 관계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지역주민의 보건의료 역량을 강화시킴으로써 사람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시민으로서 협력하는 관계를 맺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이경민 교수의 말이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
이 같은 성공에는 ‘국제개발협력 NGO 사단법인 캠프’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불라칸 현장을 직접 연결해 줄 수 있는 조직으로서 캠프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역량 강화 사업은 의사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가 영역으로 많이 치우쳐있었습니다. 주민을 직접 참여시킨다는 건 거의 시도하지 않았던 거였어요. 그래서 이 사업을 소개했을 때 주민들은 ‘그게 되는 일인가요?’라고 했었어요.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이 없었던 거죠.”
사단법인 캠프 이철용 대표의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결국 이 사업에 동참했다. 불라칸에서 10년간 다양한 사업을 해오면서 주민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아온 캠프가 적극적으로 나서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터뷰 말미, 이경민 교수는 다짐하듯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말했다.
“해외 개발협력 활동은 세계시민으로서 개발협력국이든 후원국이든 동등한 이웃으로서 문제를 함께 해결한다는 것에 중점을 둬야 합니다. 해외 개발협력을 국가 경제발전의 기회로 삼는다거나 우리의 이익에 맞춰서 기획하면 그 사업은 결코 장기적이지 않아요. 개발협력 활동은 어디까지나 파트너십으로 가야 하는 겁니다.”
건강은 깨끗한 환경에서 잘 사는 선진국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일수록 국민의 건강 문제는 경제발전에 저해가 되는 경우가 많기에 이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코이카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사단법인 캠프가 하나 되어 필리핀 불라칸에 일으킨 새바람. 그들을 위한 지역보건인력 역량강화사업은 2018년 마무리됐음에도 여전히 지역에 건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지속되고 있는 중이다.
글 이경희 ∥ 사진 장병국, 사단법인 캠프 제공